비슬산의 천년고찰 적멸보궁 용연사
옛날 못 속에 일곱 마리의 용이 살았는데 서로 승천하려고
다투며 농민을 괴롭혀 용왕의 아들이 용을 잡으려하자,
네 마리는 도망을 가고 세 마리는 잡혀 죽자 사람들이
죽은 용을 위해 용왕재를 지내주었다는 전설을 간직한
"비슬산 용연사"
어느 사찰이나 마찬가지로 일주문이 우리를 맞는다.
일주문을 지나서 오른편으로 가면 "극락전", 왼편으로 가면 "적멸보궁"이 나온다.
장마의 시작으로 비가 내려 많은 물이 흐르는개천 위의 극락교 건너 오른편으로 간다.
사천왕이 그려진 "사천왕문"을 지나 "보광루"를 통과하니 극락전 이다.
용연사는 통일신라 신덕왕 원년(912)에 보양국사가 처음 지었다고 전한다.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은 영조 4년(1728)에 다시 지었다.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간결한 맞배지붕집이다.
지붕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배치된
다포 양식으로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는 건물이다.
극락전 앞에는 고려시대의 석탑인 자그마한 삼층석탑이 있다
.
삼층석탑은 2중기단의 3층 석탑으로 기단부는 조선시대에
흔히 나타나는 양식인 판석을 중첩되게 쌓았다.
이 탑은 기단부가 거의 판석에 가까운 석재를 사용하였으며
상층기단 갑석의 전각부에 연화문을 조각하여 장식한 것이 특징이며,
지대석의 상면에도 전각부의 연화문과 양식적으로 동일한
극히 퇴화된 연화문을 한 변에 10개씩 조각, 장식하였다.
신라 신덕왕(914년)대에 창건한 후 많은 건물이 화재와 임진왜란 등으로 소실 된 후
여러 번 재건된 명부전,삼성각 등이 보인다..
채마밭 넘어 범종루는 또 다른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성철 스님이 말씀하시길 " 일을 일을 하지 않으려면 먹지도 말라" 법문 증의 한 마디가 기억난다.
건강관리의 방법 중 하나가 일을 하는 것이라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장마 비에 흐르는 물의 양이 점점 늘어나 작은 폭포를 이루고 있었다.
절로 들어가는 3문(三門) 중 절의 본전에 이르는 마지막 문. ‘불이’는 진리
그 자체를 달리 표현한 말로, 본래 진리는 둘이 아님을 뜻한다. 일체에 두루
평등한 불교의 진리가 이 불이문을 통하여 재조명되며, 이 문을 통해야만 진리의
세계인 불국토(佛國土)가 전개됨을 의미한다.
또한, 불이의 경지에 도달해야만 불(佛)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어, 여기를 지나면 금당(金堂)이 바로 보일 수 있는 자리에 세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문을 해탈문(解脫門)이라고도 한다.
적멸보궁으로 오르는 길,
석조계단 또는 금강계단이라 하는 적멸보궁 아래의 계단은 속세에서의
말하는 계단 이외의 선문답이 있을 것으로 느껴진다.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부도탑!
찾아가는길- 대구 달성군 옥포면 반송리 882
화원읍소재지- 논공방면 5번국도 이용 - 옥포삼거리에서 좌측 -
용연사방향 26번 지방도 이용하여 7.8km거리
이 곳에서도 비슬산 정상까지의 등산로(8km)가 있다.
비슬산 정상에 몇 번 올라 갔지만 유가사 및 비슬산 자연휴양림
에서 출발하여 짧은거리의 산행만 하였기에 도전해 보고싶은
산행코스이기도 하다.
대구시 달성군 옥포면에 위치한 용연사는 호젓함이 느껴지는 사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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